2020-10-16 21:55  |  건강

[청춘 리뷰] 삶은 '날 것'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이다

[청춘일보 진병두 기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생명의 소멸을 슬퍼하는 것이 삶의 필연적인 모습이다.

탄생을 기뻐하는 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게 될 때 지난 삶에 대한 후회에 휩싸인다. 지인의 죽음과 친구의 죽음, 친척과 가족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존재의 소멸 앞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것을 피하고 무시하고 멀리하려 한다.
우리는 바쁜 삶에 쫓겨서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돌아보지 못하고, 그 사실이 우리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깊이 생각할 틈이 없다.

두려움과 후회를 버리고 삶의 신비와 경이를 발견하라.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더 자세히 알고자 파헤치는 이들도 있다.

구도자들은 '죽음은 허무한 소멸이 아니다. 온전한 자유를 얻게 하는 길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아름답게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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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생명의 소멸을 슬퍼하는 것이 삶의 필연적인 모습이다. 사진=pixabay
남방 상좌부에 출가하여 승려로서 깊은 수행을 했고, 호스피스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로드니 스미스는 죽음에 깊이 천착(穿鑿)했다. 그가 출가수행자의 삶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온 것은 죽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환속한 뒤 그는 호스피스에 관련된 여러 활동에 종사하면서 죽음의 바로 곁에서 죽음과 삶을 탐구했다.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얻은 직접적인 조언과 많은 사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여러 명구 등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죽음을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임종을 맞이하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고 새로운 이해를 선사한다.

여러 수행 전통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깊이 변화시킨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삶이 일시적이고 결국 우리 행동의 결과를 제외하고는 아무데도 의지할 수 없고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남은 삶은 점점 짧아지고, 애써 모아 놓은 것은 결국 산산이 흩어진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진실 앞에서 죽음이 닥칠 때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래야 귀중한 지혜를 집중해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있다.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이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을 접할 때마다 삶을 더 깊이 이해할 기회가 생긴다. 그것은 평화로운 해결책일 수도 있고 격렬하고 극적인 투쟁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을 불편해 하는 것은 우리가 진실을 희생해서 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웰다잉, 반대를 통합하라는 요청

죽음은 완전히 반대인 것들을 통합하라는 요청이다. 즉, 삶과 죽음, 이익과 손실, 행복과 불행, 명성과 불명예, 즐거움과 고통 등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들 중 하나만 추구하고 다른 하나를 피할 때 우리는 양쪽 모두에 갇힌 죄수가 된다. 온전한 삶에서는 즐거움과 고통 모두 피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가 고통의 반대되는 것에 매달리려고 싸울 때만 괴로움을 초래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고정된 자아상에 매달릴 때 죄책감이 생긴다. 죄책감에는 자기개선이나 성장의 여지가 없고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만 가득하다. 우리는 어제나 작년에 어떤 일을 서투르게 했고, 과거의 행동 때문에 오늘 자신을 비난한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똑같은 상황이 오늘 일어났다면 우리는 과거와 매우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과거의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매달리는가? 과거의 나는 죽었으므로 그 자아상을 놓아버리고 오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됨으로써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용서할 때 우리에게 어떤 잘못을 한 사람의 행위를 용서하려 한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결코 바르게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그 잘못을 다루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인격을 용서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격이란 그 사람의 모든 행위의 합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지금 그대로 용서한다. 그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인간인 것을 용서한다. 우리가 자신의 인격의 결함을 받아들일 때 그런 용서가 일어날 수 있다.

삶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시작과 마무리의 끊임없는 연속인 삶을 만난다. 그런 삶의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는 큰 죽음 전에 수많은 작은 죽음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작은 죽음들로 인해 삶이란 물건을 소유하거나 명성을 얻는 게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죽을 때는 업적·부·걱정·계획·기대·후회·지위·특권이 모두 끝난다.

죽음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모든 것은 유한하므로 모든 것을 얻어도 지속적인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고 우리가 잘못된 것에 집중했음을 드러낸다. 이런 죽음의 교훈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모든 경험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임종하는 이들이 이런 식으로 관점을 바꾸는 일이 흔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비추어 자신이 이룬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은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내면으로 눈을 돌려 덧없는 이득과 지위를 얻고자 애썼던 잃어버린 세월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려 한다. 놀랍게도 종종 이런 성찰을 한 다음 후회에 빠지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큰 기쁨과 온전한 참여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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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더 잘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 가슴에 자비심과 사랑이 일어난다. 진정으로 남의 안녕을 염려하기 시작한다. 사진=pixabay
죽어 가는 이들은 소유물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는 욕구 너머에 있는 것, 덜 실체적이지만 궁극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것을 말한다. 죽어 가는 이들은 우리에게 관계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으라고 권한다.

관계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분명히 그것도 중요하지만, 관계란 모든 것과 연관되고, 가슴을 활짝 열고,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배우고 성장하는 능력이다.

자신이 취약도록 허용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닌 용기, 친밀하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용기를 나타낸다. 인간의 가슴에 잠재되어 있는 치유력은 친밀감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경청으로 손을 내밀고, 상대가 자신의 그림자와 가족의 그림자, 슬픔과 무력감, 분노와 두려움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감정을 무디게 하거나 소멸시키는 게 아니다. 단지 인간적 상황을 경청하고 인정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 인정받고 다른 사람 앞에 설 수 있을 때 인간의 가슴을 통해 삶과 삶이 만난다. 그러면 삶이 그 자체를 인식하고, 그런 만남으로부터 온화하고 기쁜 재결합이 일어난다.

죽어 가는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교훈은 우리가 자신에게 최악의 비평가라는 사실이다. 죽어 가는 이들은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삶을 돌아볼 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지 못했으면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과 회한을 느끼는 일이 많다.

반면에 자신의 삶의 의미가 존중받는 인생을 산 사람들은 대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다. 어떤 이들은 죽어가는 동안 삶의 목적을 발견한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모색하고 알아차림 속에서 성장할 때 자신의 언어로 의미를 찾는다. 우리에게 활기를 주는 것은 삶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 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거듭해서 진실한 것과 자신의 가치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해진다.

진심으로 삶을 배우면 자신이 하는 행동의 동기에 점점 더 민감해진다. 갈등과 반응이 일어날 때 자신의 역할에 대해 책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괴로움을 이해하고 초월하는 것이 정신적 여행을 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매우 오랫동안 고통을 회피하려 애썼기 때문에 괴로움이 주는 교훈을 알아보지 못한다. 관계의 종말, 퇴색하는 꿈, 좌절된 희망, 매일 겪는 실망 등 삶에 영향을 주는 작은 죽음들은 정신적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런 작은 신호들은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의 죽음이 닥칠 때 죽음과의 관계를 온전히 탐구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더 잘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 가슴에 자비심과 사랑이 일어난다. 진정으로 남의 안녕을 염려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피상적이고 자기 이익을 차리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남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할 때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다.

'날 것' 그대로 대상을 봐야

애도는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우리의 가슴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열어줄 가능성이 많다. 애도의 고통이 심하면 다른 데 눈을 돌려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이때 좀처럼 보기 드문 능력인 온전히 집중하기가 필요하다.

우리와 애도의 감정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애도의 감정 자체를 돌보아야 한다. 그렇게 진실하게 집중해 보살피면 우리의 마음은 마음속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우물 속에 떨어진 돌처럼 마음은 마음의 존재의 바닥까지 닿을 수 있다.

마음은 변명과 방어, 비난을 다 포기하고 '날 것' 그대로의 대상을 본다. 그러므로 애도의 혼란 속에서 거대한 힘과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자료:Lessons from the Dying, Rodney ​Smith

진병두 기자 jinbd@spring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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