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0 15:05  |  청춘

[청춘 포커스] 호상(好喪)을 잊어버린 시대

[청춘일보 진병두 기자] 인간의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끝없이 장수의 비결을 찾는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다.

공원과 스포츠센터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웰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도자처럼 되었다.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애써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신문이나 뉴스 보도 등을 통해 늘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죽음의 장면은 넘쳐난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죽음을 일상으로 접하는 오늘날이지만 삶에서 죽음을 가장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죽음은 죽음에서 현실성을 제거하고, 그리하여 TV나 신문에서 전달되는 죽음도 마치 픽션처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실제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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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친숙한 죽음을 길들여진 죽음이라 부른 것은 죽음이 예전에는 야생 상태에 있다가 인간의 손에 의해 길들여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전과는 달리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일러스트=pixabay
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친숙한 죽음을 길들여진 죽음이라 부른 것은 죽음이 예전에는 야생 상태에 있다가 인간의 손에 의해 길들여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전과는 달리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아주 먼 옛날 죽음은 길들여져 있었다.

코로나19와 실업 등으로 부쩍 자살 소식이 많은 요즘이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혹은 사고사이든 죽음은 언제나 끔찍한 어떤 것이다.

죽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며, 생의 종말이다. 예전에는 제 수명을 다한 사람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부르며 좋은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좀더 오래’를 외치는 오늘날 더 이상 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 또는 "죽음보다는 이 세상의 고통이 낫다"는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동일한 감수성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실상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즉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삶에 대한 회환의 감정은 죽음을 체념하고 받아들니는 지식인 사회의 윤리관으로부터 다소 인위적이고 과장된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어느 때라도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런 죽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는 죽음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죽음을 애써 잊는다.

죽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 혹은 죽어가는 사람도 우리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려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가문의 중대한 업으로 생각해온 우리이지만 그 조상의 묘지는 먼 시골 벽지에 (물론 명당을 찾아서라는 좋은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 명절만 되면 성묘객들의 발길이 길게 늘어서 지극한 마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죽은 이들은 우리의 생활이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의 경우 묘지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나가는 공공장소로서 늘 그들의 곁에 있었고, 고인의 묘는 성당 안에서 그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도록 방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늘날처럼 사방이 막힌 병원 침대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 친구들, 심지어 임종을 맞는 순간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이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현대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일종의 결벽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바꿔가며 변천해왔다.

중세 초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제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개인주의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죽음’.
바로크 시대 죽음을 거부하면서도 시체의 관능성에 빠져들던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바라보던 낭만주의 시대 ‘타인의 죽음’.
전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이 갑작스레 끔찍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역전된’ 오늘날의 죽음이 있다.

죽음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섯 가지의 모습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서 변천 가능한 패러다임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삶을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과 용감하게 대면해 닥쳐올 죽음을 준비해야한다. 나아가 자신의 삶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완성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자료:(L')Homme devant la mort, Philippe Arie's

진병두 기자 jinbd@spring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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