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3 12:55  |  미디어

[청춘 북리뷰] 83¼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

[청춘일보 이용규 기자] 네덜란드의 '어뢰Torepedo'라는 문학잡지 사이트에서 일기 형식으로 연재를 시작한 '83¼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는 삽시간에 독자들의 선풍적인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사립 양로원에 살고 있는 ‘헨드릭 흐룬’이라는 노인의 일상을 다룬 이 소설은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한 묘사와 서사 때문에 작가에 대한 수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의 작가는 바로 자신인 바로 헨드릭 흐룬이었다. 그는 "거짓말은 한 마디도 안 보탰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인 것도 아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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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흐룬 표지 사진, 자료:83과 4분의 1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
'83¼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는 현재 36개국에서 출판 판권이 계약되었다.또, TV드라마와 연극으로도 제작됐다. 특히, 유럽에서는 출간과 동시에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올렸다.

익명으로 집필된 작가의 데뷔작이 전 세계의 주목을 이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로원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83¼세, 네덜란드 국민 할배

북부 암스테르담의 한적한 양로원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83¼세의 헨드릭 흐룬. 고집불통에 불평만 늘어놓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노인들 틈에서 예나 지금이나 법 잘 지키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그는 실은 동료 노인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일기에서나마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쏟아내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원래 품고 있었던 인생관과 가치관은 물론,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동료 노인들의 행태, 늘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원칙’을 앞세우며 노인들이 희망하는 ‘삶의 질’보다 무사고와 안전을 지향하며 엄격한 통제와 감시로 양로원을 운영하는 스텔바흔 원장의 위선을 밝혀내 악명 높은 ‘내부고발자’ 역할을 수행해나갈 작정이다.

하지만 헨드릭이 피서르 부인에게 받은 끔찍한 케이크 조각을 별생각 없이 3층에 있는 수조에 넣었다가 다음 날 물고기들이 폐사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의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원장 이하 양로원의 관계자은 물론, 노인들마저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며 원인을 분석하고 찾기 시작한다. 헨드릭의 절친한 친구이자 장난기와 심술보가 가득한 에베르트는 그에게 내막을 듣고 한술 더 떠 ‘2차 물고기 대학살’ 계획을 세운다.

‘늙었지만 죽지 않아’ 클럽

헨드릭이 노심초사하고 있는 와중에 에이피어 브란트 부인이라는 새로운 입주자가 등장한다. 우아하고 세련된 그녀는 그의 관심을 이끌고, 취향마저 비슷한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된다. 헨드릭은 이참에 에베르트와 에이피어를 포함하여 뜻이 잘 맞는 친구 다섯 명과 ‘늙었지만 죽지 않아’ 클럽을 만들어 은밀하게 활동하기로 한다. 멤버들이 각자 순번을 정해 나들이 계획을 세우고 한 달에 두 번 실행하자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다.

헨드릭의 일기는 내부고발자의 활동일지라는 본래 뜻과는 다르게, 차츰 유쾌하고 마음 따뜻한 경험과 때론 불쾌하고 가슴 미어지는 소소한 사건으로 채워진다. 그는 글쓰기의 효과를 실감하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예전과 달라진 것을 실감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헨드릭과 ‘늙었지만 죽지 않아’ 멤버들은 클럽의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된다.

양로원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일기에는 뜻밖에도 굵직한 문제들이 가득하다.

2010년대 중반, 네덜란드 사회를 관통하는 이슈들은 물론, 안락사의 허용 여부, 복지 재원 마련에 대한 정치적 논란, 노인 의료비 지원 감축정책의 파장 등 고령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의 광범위한 문제들이 논의된다.

사회적 문제뿐만이 아니다. 그의 일기에서는 정신은 온전한데 날이 갈수록 신체 기관이 약화되면서 느끼게 되는 삶의 괴리, 맺음과 헤어짐의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만족과 결핍,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 앞에서 곱씹어보는 삶의 의미 등 다양한 철학적인 문제들도 만나게 된다.

이같은 문제에 헨드릭 흐룬은 솔직하고 거침없이 제 목소리를 쏟아낸다. 위선적인 정치인과 정책에 대해 독설을 퍼붓고, 주말마다 양로원을 찾는 부양자들의 본심을 꼬집기도 한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에 접어든 동료를 돌봐주기도 하고, 요실금을 앓으며 자신의 존엄을 이제 어떻게 지킬지에 대해 고민한다.

노인병 의사를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아야겠다. 오줌이 새는 이 부분을 어찌 할 방법이 없는지, 아니면 기저귀 착용을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어봐야 하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저귀를 찰 때가 내 마지막 존엄을 상실하는 순간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기준을 조금 더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끓는 냄비 속 개구리, 그게 나다.

또, 새롭게 시작된 연애에 마음을 설레기도 하고, 누군가의 단순한 행동을 단번에 꿰뚫어볼 줄 알고, 화창한 날씨와 꽃만으로도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그는 날카로운 관찰력의 소유자이다. 재치 있고 신랄한 유머감각은 독자들을 그의 일상으로 빠져들게 한다.

우리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지만, 세상의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지만, 서둘러야 할 만한 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헨드릭과 더불어 ‘늙었지만 죽지 않아’의 멤버들 또한 평탄하지 않은 삶의 내공을 선보이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발가락에 이어 무릎 아래까지 절단하게 되었어도, 뇌졸중으로 언어능력 대부분을 잃었더라도,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을 알고 깨달았더라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는 것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더라도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의 모습에는 나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자존감은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 있는 듯하다.

헨드릭은 “계획이 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자료:83과 4분의 1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

이용규 기자 leeku@spring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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